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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1월 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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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구리 동구릉 탐방 / 추존 문조와 신정황후의 능, ‘수릉’


◆ 세계유산 구리 동구릉 탐방


/


추존 문조와 신정황후의 능


, ‘


수릉





안녕하세요


.


좋은 하루 되세요


^^


며칠 전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세계유산 구리 동구릉을 탐방하였는데


,


오늘은 동구릉에 있는 추존 문조와 신정황후의 능인 수릉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





1.


동구릉은


?


동구릉은 동쪽에 있는


9


기의 능이라는 뜻


으로


,


조선 왕실 최대규모의 왕릉군


이다


.


즉 동구릉에는


9


개의 능이 있어 조선 왕조


42


개 능의


20


퍼센트가 포함될 정도로 비중이 남다르다


.


동구릉은




구리시 인창동 검암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며


9


개의 능에


17





(





)


에 달하는 조선의 왕과 왕비 유택이 있는 가족묘다


.





9





17





(





)


의 왕과 왕비가 안장되어 있으며


,


총 면적이


191





5,890


제곱미터나 된다


.


동구릉은 사적 제


193


호로 지정되어 있다


.




1408


년 태조의 왕릉이 자리하고 건원릉이라 이름한 뒤


, 1855





(


철종


6)


익종


(


翼宗


)


의 능인 수릉이


9


번째로 조성되어 동구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








2.


수릉


綏陵


(


추존 문조와 신정황후의 능


)





.


능의 개요




◎ 위치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 능의 형식


:


합장릉


◎ 능의 조성


: 1855





(


철종


6), 1890





(


고종


27)






.


능의 구성


수릉은 추존 문조익황제와 신정익황후 조씨의 능이다


.


수릉은 한 봉분 안에 왕과 왕비를 같이 모신 합장릉의 형식이다


.


보통의 합장릉은 혼유석을 각각


2


좌씩 놓았으나 조선 후기부터 조성된 합장릉은 혼유석을


1


좌로 줄여서 조성하였다


.


문석인은 기존의 복두관복 대신 금관조복으로 조각하였다


.


일반적으로 왕릉은 우상좌하


(


右上左下


)


의 형태로




왕이 오른쪽


,


왕비가 왼쪽에 모셔지는 것이 원칙이나


수릉은 왕이 왼쪽


,


왕비가 오른쪽에 모셔져있다


.




이는 세상을 떠날 때의 신분차이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


능침 아래에 있는 비각에는 총


2


개의 표석이 있는데


, 1


비는 익종대왕과 신정왕후의 표석이고


2


비는 문조익황제와 신정익황후의 표석이다


.


















.


능의 역사


문조는 처음 효명세자의 신분으로


1830





(


순조


20)


에 세상을 떠나


,


경종의 의릉 왼편에 연경묘라는 이름으로 묘를 조성하였다


.


1834


년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익종으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수릉


이라 하였으며


, 1846





(


헌종


12)


에 풍수상 불길하다 하여 양주 용마봉


(


현 광진구 용마산


)


으로 천장하였다


.


그러다가


1855





(


철종


6)


에 다시 천장론이 거론되어 현재의 동구릉에 마지막으로 조성되었다


.


이후


1890





(


고종


27)


에 신정익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수릉에 합장으로 능을 조성하였다


.






.


문조익황제


(


文祖翼皇帝


)


이야기


추존황제 문조는 순조와 순원숙황후 김씨의 아들로


1809





(


순조


9)


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태어났다


.


1812





(


순조


12)


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 1827





(


순조


27)


에 부왕을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시작하였다


.


왕세자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극에 달한 시기였으나 대리청정을 통해 강인한 군주의 모습을 보였다


.


특정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그동안 소외되어 있던 인재들을 고루 등용하였으며


,


백성을 위하는 선정을 펼쳤다


.


또한 실학파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와 교류하며 견문을 넓히고


,


타문화 수용에 긍정적인 자세를 보였다


.


예악진흥을 위해 궁중연회에 쓰이던 춤과 노래인 정재


(


呈才


)


를 발전시켜 손수 악장


,


치사


,


전문 등을 직접 지었고


,


춘앵전을 편곡하기도 하였다


.


그러나


1830





(


순조


30)


에 창덕궁 희정당에서


22


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


,


시호를 효명세자


(


孝明世子


)


라 하였다


.


이 후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익종대왕으로 추존되었고


,


대한제국 선포 후


1899





(


광무


3)


에 고종의 직계


5


대 조상 추존으로 문조익황제로 추존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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