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깜짝 발표를 했습니다. 동해안에 최대 140억 배럴에 달하는 석유 및 가스가 매장돼 있을 수도 있다는 분석 결과를 공개한 겁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엄청난 양의 자원이 매장돼 있을 수도 있다니. 곧 ‘우리나라도 산유국 대열에 합류하는 것 아니냐’는 언론 보도가 쏟아졌고, 에너지 관련 기업 주가도 요동쳤습니다.
1. 갑자기 석유라니, 무슨 이야기야?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3일, 취임 이후 처음으로 국정 브리핑을 열고 “동해 포항 영일만 앞바다에 막대한 양의 석유와 가스가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물리탐사 결과가 나왔다”라고 밝혔습니다. 정부는 포항 인근 심해에 석유와 가스가 매장돼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지난해 2월 미국의 심해 기술 평가 전문기업 ‘액트지오(ACT-GEO)’에 심층 분석을 맡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업체에서 최소 35억 배럴, 최대 140억 배럴에 달하는 석유와 가스가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을 했다는 겁니다.
최대로 추정되는 매장량인 140억 배럴이 얼마나 많은 양인지 감이 안 오실 수도 있습니다. 만약 140억 배럴의 석유·가스가 매장돼 있다면, 한국은 브라질(127억 배럴)을 누르고 세계 15위의 산유국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14위는 252억 배럴이 매장된 카타르입니다.
2. 우리는 자원 빈국 아니었어?
사실 우리나라가 산유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도전해 온 역사는 50년이 넘습니다. 특히 포항 인근에 석유·가스가 매장돼 있다는 이야기는 1970년대부터 계속해서 나왔었습니다. 실제로 박정희 정부가 집권했던 1975년에는 ‘포항 석유 발견’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당시 정부는 포항 인근 해역에서 석유 자원을 탐사하기 위해 땅속으로 구멍을 파는 시추 작업을 하다가 검은 액체가 흘러나오자 “포항에서 석유가 발견됐다”라고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원유가 아닌 것으로 판명돼 큰 실망감을 안겼던 사건입니다.
이후로도 우리나라 정부는 포항 인근에서 석유·가스 자원을 탐사하는 데 꾸준히 힘을 써 왔습니다. 결국 1998년에는 동해에서 4,500만 배럴 규모의 가스전을 발견했고, 작은 규모이지만 상업 생산까지 성공했습니다. 매출 2조 6,000억 원, 순이익 1조 4,000억 원의 실적을 거뒀던 동해 가스전은 지난 2021년에 생산이 끝났습니다.
3. 그럼 이제 한국도 오일머니 버는 거야?
대통령실이 발표한 분석 결과가 사실이라면, 한국 자원개발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을 만큼 압도적인 규모의 자원이 매장돼 있는 셈입니다. 최대 추정 매장량인 석유·가스 140억 배럴은 전 국민이 최장 30년을 사용할 수 있는 천연가스와 4년 동안 쓸 수 있는 석유입니다. 이를 현재 가치로 따져보면 최대 2,200조 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삼성전자 시가총액(전체 주식가치의 합)의 약 5배에 해당하는 규모입니다.
다만 대통령실에서 발표한 것만큼의 자원이 매장돼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번 발표는 ‘자원이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고, ‘결국은 파 봐야 안다’는 게 에너지 업계 전문가들의 이야기입니다.
석유·가스전 개발은 물리 탐사 → 탐사 시추 → 경제성 평가 → 원유 생산의 단계로 진행됩니다. 정부에서 이번에 밝힌 건 물리 탐사 결과고, 이제 석유·가스가 발견될 때까지 여러 개의 시추공(시추 구멍)을 뚫는 탐사 시추를 통해 실제로 석유와 가스가 매장돼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원개발 선진국인 미국 등에서는 물리탐사 단계에서의 자원량과 실제 시추 이후에 확인한 추정량을 엄격하게 구분해 용어 사용을 하도록 규제하고 있다고 합니다. 물리 탐사 단계에서 자원량을 발표해 너무 섣부른 기대를 불러일으키면, 자원 관련 기업 주가가 치솟는 등 각종 부작용이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석유가 있어도 경제성은 없을 수도
시추 작업을 통해 실제로 매장된 자원의 양이 확인되면, 경제성 평가를 실시합니다. 석유와 가스를 생산하고 개발하는 데 들어가는 원가와 실제로 판매되는 가격 간의 상관관계를 따져서 ‘사업성이 있느냐’를 따지는 겁니다. 정부는 올해 말에는 탐사 시추를 시작하겠다는 계획입니다. 1차 결과는 내년 3~4월 정도에 나온다고 합니다. 경제성이 확인되면 2027~2028년에는 채굴을 위한 공사를 진행하고, 2035년부터 상업적 개발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에너지 업계 전문가들은 ‘관건은 채굴 경제성이 있는지에 달려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바다 깊은 곳에 매장된 자원을 채굴해 내는 작업은 원가가 높기 때문에, 그렇게 생산해 낸 자원을 충분한 값에 팔 수 있는지가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시추공을 뚫는 데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요. 정부는 최소 5개의 시추공을 뚫어야 할 것으로 보고 있는데, 시추공 1개당 1,000억 원이 넘는 자금이 투입됩니다. 실제로 동해 가스전의 경우 무려 11번의 시추 끝에 가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동해 가스전의 시추 작업이 이뤄진 1990년대에 비하면, 지금은 기술이 훨씬 발전했을 겁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석유 탐사 성공률은 20% 내외에 불과합니다. 5번 시추공을 뚫으면 한 번 성공할 정도의 확률이라는 겁니다. 자칫하면 불확실한 사업에 혈세를 낭비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5. 조금은 서둘러서 발표한 이유?
종합하자면, 아직은 동해안에 석유·가스가 매장돼 있다고 확언하기에는 시기상조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런데 20%에 불과한 확률에 비해, 정부는 이번 이슈를 꽤 중대하게 다뤘습니다.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으로 국정 브리핑을 열고 직접 발표에 나섰을 정도입니다.
‘정부가 무리해서라도 이런 발표를 한 건 최근 들어 크게 떨어진 대통령 지지율을 만회하고자 한 것 아니냐’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최근에는 윤 대통령의 직무수행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국민이 21%에 불과하다는 여론조사까지 나왔다고 합니다.
또 기후 위기로 전 세계가 석유·가스전 개발을 중단하는 추세인데, 이런 흐름에 어긋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옵니다. 우리나라는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하겠다고 선언해 놓은 상황인데, 정부의 발표대로라면 2060년 이후까지도 화석연료를 채굴하게 됩니다.
물론 국내에서 석유·가스가 발견된 건 에너지 자립 차원에서 아주 반가운 소식입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등으로 에너지를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는 게 위험하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세계 각국은 에너지 자립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도 산유국 대열에 합류하고, 원유 수출까지 가능해진다는 소식은 달갑게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에너지가 매장돼 있다고 해도 아직 갈 길이 먼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지금은 섣부르게 기대에 부풀기보다, 긴 호흡으로 도전에 임할 각오를 하는 게 필요한 시점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