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구리 동구릉 답사
]
조선왕릉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
, ‘
현릉
’
안녕하세요
.
좋은 하루 되세요
^^
며칠 전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구리 동구릉을 답사하였는데
,
오늘은 조선왕릉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인 현릉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
1.
구리 동구릉은
?
구리 동구릉은 동쪽에 있는
9
기의 능이라는 뜻
으로
,
조선 왕실 최대규모의 왕릉군
이다
.
즉 동구릉에는
9
개의 능이 있어 조선 왕조
42
개 능의
20
퍼센트가 포함될 정도로 비중이 남다르다
.
동구릉은
구리시 인창동 검암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며
9
개의 능에
17
위
(
位
)
에 달하는 조선의 왕과 왕비 유택이 있는 가족묘다
.
즉
9
릉
17
위
(
位
)
의 왕과 왕비가 안장되어 있으며
,
총 면적이
191
만
5,890
제곱미터나 된다
.
동구릉은 사적 제
193
호로 지정되어 있다
.
1408
년 태조의 왕릉이 자리하고 건원릉이라 이름한 뒤
, 1855
년
(
철종
6)
익종
(
翼宗
)
의 능인 수릉이
9
번째로 조성되어 동구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
2.
현릉
顯陵
(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
)
가
.
현릉의 개요
.
위치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
능의 형식
:
동원이강릉
.
능의 조성
: 1452
년
(
단종 즉위
), 1512
년
(
중종
7)
나
.
현릉의 구성
현릉은 조선
5
대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능이다
.
현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
(
同原異岡陵
)
의 형태이다
.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
(
서쪽
)
이 문종
,
오른쪽 언덕
(
동쪽
)
이 현덕왕후의 능이다
.
다
.
현릉의 능제
현릉의 능제는
『
국조오례의
』
의 제도를 따랐다
.
문종의 능 병풍석의 무늬는 이전의 영저와 영탁대신 구름무늬로 바뀌었고
,
혼유석 받침대인 고석의 수량도
4
개로 줄었다
.
능침 하계에는 무석인과 석마를 배치하였고
,
중계에는 문석인과 장명등이 배치되어 있다
.
현덕왕후의 능침은 문종의 능침과 같은 상설로 조성하였으나 병풍석을 생략하였다
.
현릉 이후부터는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는데
,
그 이유는 임금의 치적이 국사
(
실록
)
에 실리기 때문에 굳이 세울 필요가 없다는 논의 때문이었다
.
라
.
현릉의 역사
1452
년
(
문종
2)
에 문종이 세상을 떠나자 수양대군
(
세조
),
황보인
,
김종서
,
정인지 등의 대신을 비롯하여 풍수지관이 현지를 답사하고 건원릉 남동쪽에 현릉을 조성하였다
.
처음 문종은 세종의 구 영릉
(
서울 내곡동 헌릉 서쪽
)
근처에 묻히기를 원하였으나 자리가 좋지 않아 현재의 자리로 정하였다
.
현덕왕후 권씨는 문종이 세상을 떠나기
11
년 전에 왕세자빈 신분으로
1441
년
(
세종
23)
에 먼저 세상을 떠나
,
안산의 소릉
(
昭陵
)
에 모셔졌었다
.
이후 현덕왕후는 세조 즉위 후 단종 복위 사건에 친정 어머니와 남동생이 연루되는 바람에 폐위되었다가
, 1512
년
(
중종
7)
에 복위되어 다음 해인
1513
년
(
중종
8)
에 문종의 현릉 동쪽 언덕으로 사후
72
년만에 왕의 곁으로 능을 천장하였다
.
이 때 두 능 사이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
이유 없이 저절로 말라 죽어 두 능 사이를 가리지 않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마
.
문종 이야기
문종
(1414~1452,
재위
1450~1452)
은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첫째 아들로
1414
년
(
태종
14)
에 사저에서 태어났다
.
아버지 세종이 즉위하자
1421
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
세종재위 말년에 부왕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기 시작하였다
.
대리청정기간에 문무 관리를 고르게 등용하고 언로를 자유롭게 열어 민정파악에 힘쓰는 등 나라의 안정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
『
조선왕조실록
』
에 따르면 문종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말이 적고
,
학문을 좋아했다고 한다
.
또한 문종은 천문에 능통하였으며
,
측우기도 발명하였다
. 1450
년에 조선 최초로 적장승계의 원칙에 따라 세종을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
재위 기간 내에는
『
동국병감
(
東國兵鑑
)
』
이 출간되었고
,
『
고려사
(
高麗史
)
』
와
『
고려사절요
(
高麗史節要
)
』
등이 편찬되었다
.
한편 병제
(
兵制
)
를 정비하여
3
군의
12
사를
5
사로 줄인 반면
,
병력을 증대시키고 각 병종을
5
사에 배분하였다
.
그러나
1452
년
(
문종
2)
에 경복궁 천추전에서
39
세로 세상을 떠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