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유산 구리 동구릉 탐방
/
조선
1
대 태조의 능
, ‘
건원릉
’
안녕하세요
.
좋은 하루 되세요
^^
며칠 전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세계유산 구리 동구릉을 탐방하였는데
,
오늘은 동구릉에 있는 조선
1
대 태조의 능인 건원릉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
1.
동구릉은?
동구릉은 동쪽에 있는
9
기의 능이라는 뜻
으로
,
조선 왕실 최대규모의 왕릉군
이다
.
즉 동구릉에는
9
개의 능이 있어 조선 왕조
42
개 능의
20
퍼센트가 포함될 정도로 비중이 남다르다
.
동구릉은
구리시 인창동 검암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며
9
개의 능에
17
위
(
位
)
에 달하는 조선의 왕과 왕비 유택이 있는 가족묘다
.
즉
9
릉
17
위
(
位
)
의 왕과 왕비가 안장되어 있으며
,
총 면적이
191
만
5,890
제곱미터나 된다
.
동구릉은 사적 제
193
호로 지정되어 있다
.
1408
년 태조의 왕릉이 자리하고 건원릉이라 이름한 뒤
, 1855
년
(
철종
6)
익종
(
翼宗
)
의 능인 수릉이
9
번째로 조성되어 동구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
광대한 숲에는 건원릉을 비롯해 제
5
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인 현릉
,
제
14
대 선조와 의인왕후
,
계비 인목왕후의 능인 목릉
,
제
18
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인 숭릉
,
제
16
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능인 휘릉
,
그리고 제
20
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능인 혜릉
,
제
21
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능인 원릉
,
제
24
대 헌종과 효현왕후
,
계비 효정왕후의 능인 경릉
,
제
23
대 순조의 세자인 익종과 신정왕후의 능인 수릉이 자리하고 있다
.
2.
건원릉健元陵(조선 태조의 능)
가
.
능의 개요
건원릉은 조선
1
대 태조의 능
으로 위치는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에 있으며
,
능의 형식은 단릉이고 능은
1408
년
(
태종
8)
에 조성
되었다
.
나
.
능의 구성
건원릉은 조선 왕릉 제도의 표본
이라고 할 수 있다
.
기본적으로는 고려 공민왕의 현릉
(
玄陵
)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
고려 왕릉에는 없던 곡장을 봉분 주위에 두르는 등 세부적으로 석물의 조형과 배치 면에서 일정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
봉분에는 다른 왕릉처럼 잔디가 아닌 억새풀을 덮었
는데
,
『
인조실록
』
에 태조의 유교
(
遺敎
)
에 따라 청완
(
靑薍
,
억새
)
을 덮었다는 기록이 있다
.
태조의 건원릉에 잔디가 아닌 억새풀이 덮여있는 까닭은 태조의 특별한 유언 때문이다
.
태조는 조선을 건국하는 위업을 이뤘지만
,
그 후 왕자들이 형제간의 살육을 마다하지 않으며 벌이는 권력 다툼을 겪는 등 무거운 마음의 짐을 안은 채 말년을 보내야 했다
.
승하하기 전 태조는 왕 이전의 한 사람으로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고향 땅의 흙과 풀 아래 잠들고 싶은 마음을 유언으로 남긴 것이다
.
능침에는
12
면의 화강암 병풍석이 둘러싸고 있는데
,
병풍석에는 십이지신과 영저
(
금강저
)
및 영탁
(
방울
)
등을 새겼다
.
병풍석 밖으로는
12
칸의 난간석을 둘렀고
,
난간석 밖으로는 석호와 석양이 네 마리씩 교대로 배치되어 있다
.
봉분 앞에는 혼유석이 있는데
,
혼유석 밑에는 도깨비가 새겨진 북 모양의 고석
5
개가 놓여 있고 양 옆으로는 망주석이 한 개씩 서있다
.
중계에는 장명등과 석마 한 필씩이 딸려 있는 문석인이 놓여 있고
,
하계에는 무석인과 석마가 양쪽에 놓여 있으며 가운데에는 정중석이 있다
.
능 아래에는 정자각
(
보물
),
비각
,
수복방
,
수라간
,
홍살문
,
판위 등이 배치되어 있고
,
비각 안에는 태조가 세상을 떠나고 태종대에 세운 신도비
(
보물
)
와 대한제국 선포 후 태조고황제로 추존된 능표석이 세워져 있다
.
다
.
능의 역사
1408
년
(
태종
8) 5
월
24
일에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6
월
28
일에 지금의 구리시인 양주 검암산에 능지를 정하였다
. 7
월 말을 기하여 산릉 공사를 시작한 후
9
월
9
일에 발인하였다
.
산릉공사를 위하여 충청도에서
3,500
명
,
황해도에서
2,000
명
,
강원도에서
500
명 등 총
6,000
명의 군정을 징발하였다
.
태조는 생전에 두 번째 왕비 신덕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원하여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
(
貞陵
)
에 본인의 자리
(
신후지지
)
를 미리 마련해두었으나 태종은 태조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
태조의 능을 지금의 자리에 조성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