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2월 5,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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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조선왕릉 답사] 구리 동구릉 18대 조선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 ‘숭릉’


[


세계유산 조선왕릉 답사


]


구리 동구릉


18


대 조선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


, ‘


숭릉





안녕하세요


.


좋은 하루 되세요


^^


얼마 전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조선왕릉 구리 동구릉을 답사하였는데


,


오늘은 그중에서


18


대 조선 현종과 현종의 비 명성왕후의 능인





숭릉





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


구리 동구릉은 동쪽에 있는


9


기의 능이라는 뜻으로


,


조선 왕실 최대규모의 왕릉군이다


. 9


개의 능에


17





(





)


에 달하는 조선의 왕과 왕비 유택이 있는 가족묘다


.


동구릉은 사적 제


193


호로 지정되어 있다


.




1408


년 태조의 왕릉이 자리하고 건원릉이라 이름한 뒤


, 1855





(


철종


6)


익종


(


翼宗


)


의 능인 수릉이


9


번째로 조성되어 동구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


img


1.


숭릉


崇陵


(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


)


의 개요


◎ 위치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 능의 형식


:


쌍릉


◎ 능의 조성


: 1674





(


숙종 즉위


), 1684





(


숙종


10)


img


2.


능의 구성


숭릉은 조선


18


대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능이다


.


숭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


(


雙陵


)


형식이다


.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고 난간석으로 두 봉분을 연결하였으며 능침 앞에는 혼유석이 각각


1


좌씩 놓여 있다


.


그 밖의 석양


,


석호


,


망주석


,


문무석인


,


석마 등은 일반적인 조선왕릉의 형태로 배치되었다


.


숭릉의 석물은 효종의 구 영릉


(


寧陵


)


의 석물을 다시 사용한 것으로


,


영릉


(


寧陵


)


이 여주로 천장될 때 석물을 묻었다가 다시 꺼내 사용하였다


.


망주석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


위쪽에는





세호





라고 불리는 작은 동물 조각이 뚜렷하게 조각되어 있다


.


능침 아래에 있는 정자각은 조선왕릉


40


기 중 유일하게 남은 팔작지붕 정자각이며


,


보물로 지정되었다


.


img


img


img


img


3.


능의 역사


1674





(


현종


15)


에 현종이 세상을 떠나


,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


숭릉을 조성할 때


8


도의 승군


2,650


명을 징발하여 능을 공사하였다


.


숭릉의 혈을 파기 위해 겉흙을 걷어냈을 때 부도를 세우려 했던 흔적이 나왔으나


,


깊이가


3


척밖에 되지 않아 지맥을 손상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한 광중 밖이기 때문에 그대로 진행하였다


.


숭릉 조성 후


9


년이 지난


1683





(


숙종


9)


에 명성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나


,


그 다음 해 숭릉에 쌍릉으로 능을 조성하였다


.


4.


현종


(


顯宗


)


이야기


현종


(


재세


: 1641





~ 1674





,


재위


: 1659





~ 1674





)


은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아들로


1641





(


인조


19)


에 청나라 심양 관사에서 태어난 조선 역대 임금 중에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왕이다


.


1645





(


인조


23)


에 인조의 세자인 소현세자가 급서하고 아버지 봉림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되는 동시에 원손이 되었고


, 1648





(


인조


26)


에 왕세손이 되었다


.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세자가 된 후


1659


년에 왕위에 올랐다


.


재위 기간 동안에 함경도 산악지대를 개척하고


,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된 북벌정책을 중단시켰으며


,


호남 지방에 대동법을 시행하였다


.


동철활자


10


만 자를 주조시켰으며


,


천문 관측과 역법 연구를 위하여 혼천의를 다시 제작하게 하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


그러나 두 차례의 예송논쟁으로 붕당의 싸움이 치열하기도 하였다


. 1647





(


현종


15)


에 창덕궁 재려에서


34


세로 세상을 떠났다


.


5.


명성왕후


(


明聖王后


)


이야기


명성왕후 김씨


(


재세


: 1642





~ 1683





)


는 본관이 청풍인 청풍부원군 김우명과 덕은부부인 송씨의 딸로


1634





(


인조


12)


에 장통방


(


현 서울 종로


2


가 관철동


)


사저에서 태어났다


.


1651





(


효종


2)


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


현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


현종 사이에


1





(


숙종


) 3





(


명선공주


,


명혜공주


,


명안공주


)


를 낳았다


.


명성왕후는 지능이 뛰어나고 성격이 과격했다고 전해진다


.


그 때문에 궁중의 일을 다스림에 있어서 거친 처사가 많았고 공공연히 조정의 정무에까지 간여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다


.


그 후


1683





(


숙종


9)


에 창덕궁 저승전에서


42


세로 세상을 떠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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