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셤의 법칙은 영국의 금융업자 겸 사업가인 토머스 그레셤이 주장한 이론으로, 흔히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내쫓다)한다’라는 말로 정의됩니다.
그럼 ‘악화’는 무엇이고 ‘양화’는 무엇일까요? 과거 영국에서는 귀금속인 금화나 은화가 화폐로 유통됐습니다. 그런데 경제가 나빠지면서 화폐에 들어가는 금이나 은의 함량을 줄여서 발행하게 됐지요.
그러자 너나 할 것 없이 이런 돈(악화)만 사용하고, 금이나 은의 함량이 높은 돈(양화)은 장롱 속에 깊이 숨겨놓고 쓰지 않았습니다. 결국 시중에는 점차 악화만 유통되고 양화는 사라지만 현상이 빚어졌습니다. 말 그대로 악화가 양화를 내쫓은 셈입니다.
사실 요즘에도 이 같은 법칙이 적용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빳빳한 신권지폐보다 너덜너덜한 구권 지폐를 먼저 쓰는 것처럼 말이죠.
5만 원의 사례를 통해서도 그레셤의 법칙을 알 수 있습니다. 2009년 10만 원 수표 발행 비용을 줄이고 거래의 편의를 도모한다는 목적으로 5만 원권 지폐가 발행됐습니다.
일반적으로 은행을 떠난 화폐 중 80%는 은행으로 돌아오지만 5만원권은 예외입니다. 5만 원권의 환수율은 2014년 25.8%에서 2018년 67.4%로 크게 늘었지만 100%를 육박하는 1만 원권에 비하면 낮은 수치입니다.
환수율에 비해 5만원권 수요가 많다 보니 공급이 해마다 늘어 2018년 6월 기준 전체 화폐 발행액 110조 693억 원 중 5만 원권의 비중이 81.28%에 달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5만 원권은 모두 어디 있는 걸까요?
2011년에는 한 마늘밭에서 5만원권으로만 무려 110억 원의 현금이 발견돼 세상이 떠들썩했습니다. 이 돈이 불법 도박 수익금으로 밝혀지면서, 5만 원권이 탈세나 뇌물, 범죄에 사용되기 때문에 환수율이 낮다는 세간의 소문을 뒷받침했죠.
범죄나 세금회피라는 반사회적 요인(악화)이 5만 원권(양화)을 내쫓고 있는 셈입니다.
그레셤의 법칙은 원래 경제용어지만, 요즘은 품질이 좋은 제품 대신 저질 제품이 판을 치는 사회현상을 가리킬 때도 쓰입니다. 정품 소프트웨어보다 복사한 프로그램이 더 많이 유통되는 현상, 기업 임원이 똑똑한 사람 대신 멍청하고 말 잘 듣는 사람을 더 키워서 똑똑한 사람이 조직을 떠나게 만드는 것,
석유를 주무기로 삼는 막강한 석유 메이저 회사들이 전 세계의 석유 장악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친환경자동차의 출현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것 등이 모두 여기에 포함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