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등장 후 마차 업계가 자신들의 입지를 잃지 않기 위해 시행했던 법안
흔히 ‘최대의 적(敵)은 내부에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도약의 발목을 잡아 발전이 아닌 퇴보의 길로 이끄는 암적 존재가 다름 아닌 조직 내부에 자리 잡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과거 역사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산업혁명 발원지인 영국은 1826년 세계 최초로 28인승 증기기관 자동차를 선보였습니다. 이 자동차는 비록 현재의 자동차 엔진이 아닌 증기기관을 탑재했지만, 최초로 상용화에 성공한 차량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증기기관 자동차는 당시 기술 수준을 감안하면 혁신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나의 행복은 남의 불행’이라는 말이 있지요. 영국인들은 증기 자동차 출현에 환호했지만, 안절부절못하며 밤잠을 설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바로 마차업 종사자였죠.
마차 업자들은 증기 자동차의 등장에 생존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이들은 자칫 밥그릇을 빼앗길 수 있다는 절체절명의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결국 마차 업자들은 들고 일어섰습니다. 이들은 자동차 때문에 말(馬)이 놀라고 자동차가 도로를 망친다는 황당한 논리를 펼쳤습니다.
영국정부는 이들 마차 업자의 압력에 굴복해 1865년 적기 조례(Red Flag Act)라는 기상천외한 법을 선포했습니다. 이른바 ‘빨간 깃발법’으로 불리는 이 법규는 차량 한 대에 무조건 운전수, 기관원, 기수 3명을 고용해야 했습니다. 또한 마차가 55m 전방에서 붉은 깃발을 꽂고 달리면 자동차는 그 뒤를 따라가야 했습니다.
법규에 따라 자동차의 최고 속도는 시속 6.4km로 묶었습니다. 당시 자동차는 시속 30km를 넘게 달릴 수 있는 성능을 갖췄습니다. 런던 시민들에게 마차보다 느린 증기자동차를 타라는 얘기였죠. 코미디가 따로 없습니다.
이와 같은 ‘적기 조례의 저주’는 희생양을 낳았습니다. 적기 조례는 31년이 지난 1896년 폐지됐지만, 어처구니없는 규제의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영국이 적기 조례의 늪에 빠져 허덕이고 있는 사이에 독일과 프랑스 등 경쟁국의 자동차 산업은 본궤도에 올랐습니다.
반면, 자동차의 선두주자였던 영국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됐습니다. 결국 마부들도 일자리가 사라지는 등 해피엔딩이 아니었습니다. 유망산업이 정부의 황당한 규제에 발목이 잡혀 ‘폭망’ 한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적기 조례의 망령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요. 한국도 예외는 아닙니다. 대표적인 예가 드론(dron, 소형 무인항공기) 산업입니다. 전 세계 시청자들은 지난 2018년 2월 25일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에 평창의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은 드론 쇼를 목격하며 감탄을 금치 못했을 겁니다.
그러나 약 1,200개가 넘는 드론을 하늘에 동시에 띄우는 이른바 ‘군집(群集) 드론 기술’ 은 한국 드론 회사가 아닌 미국 인텔사의 작품이었습니다. 우리 무대를 남의 손에 맡긴 처지가 된 셈이지요. 주먹으로 땅을 치며 통탄해야 할 대목은 우리가 드론 기술을 먼저 개발한 선두주자였지만, 정부의 규제로 정작 드론 기술이 외국에서 활짝 꽃을 피웠다는 점입니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이 2013년 실내 군집 드론 기술을 개발해 세계를 놀라게 했고, 2016년에 인텔과 같은 실외 군집 드론 기술을 확보했습니다. 한국은 드론 택시의 핵심인 수직이·착륙 기술도 2012년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개발했지만, 규제의 벽에 부딪혀 상용화에 실패했지요.
드론이 한국에서 규제의 그물에 갇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사이에 세계 드론 시장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2018년 기준 전 세계 드론 시장 규모는 19조 3,400억 원(약 2경 1,515조 원)에 달하였습니다. 하지만 한국 드론 시장의 규모는 704억 원대입니다. 이는 세계 시장과 비교하면 고작 0.3%에 불과합니다.
미국이 세계 최고의 AI 강국이 된 비결은 간단합니다. 미국은 지난 50년간 정권교체나 경기 침체에 관계없이 정부가 대학교, 연구소, 기업과 손잡고 첨단 기술 개발에 매진해왔습니다. 중국도 오는 2030년까지 모든 AI 분야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선보인 지 오래입니다.
‘경제의 최대의 적은 정치’입니다. 정차가 시장보다 효율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규제인·허가의 열쇠를 쥐고 있는 정부는 시장의 불완전성, 불공정성을 언급하며 시장의 실패를 막기 위해 정치적 접근과 입법적 제한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영국 경제학자이며 ‘애덤 스미스 연구소’를 설립한 이몬 버틀러는 2008년 6월에 출간한 그의 저서 <시장경제의 법칙>에서 “정치적 의사결정은 시장 선택보다 비효율적”이라고 설파한 것은 규제가 시장경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일갈한 것입니다.
이제는 정권이 바뀌어도 국가적 차원의 연구개발은 꾸준히 밀고 나가는 정치적 합의와 실천적 의지가 절실합니다.
첨단 R&D 사업은 정권의 입맛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쉽게 바뀌는 전리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4차 산업혁명의 거센 파도가 밀려오는데 우리가 자칫 한눈을 팔면 파고(波高)에 휩쓸려 표류하는 신세가 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