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답사
]
구리 동구릉 영조와 정순왕후의 능
, ‘
원릉
’
안녕하세요
.
좋은 하루 되세요
^^
며칠 전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구리 동구릉을 답사하였는데
,
오늘은 그중에서 영조와 영조의 두 번째 왕비인 정순왕후의 능인 원릉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답사] 구리 동구릉 영조와 정순왕후의 능, ‘원릉’ 1 img](https://blog.kakaocdn.net/dn/chsX6g/btrMxTND2Ru/29e3utpHENliSVk5Ep9rak/img.png)
구리 동구릉은 동쪽에 있는
9
기의 능이라는 뜻으로
,
조선 왕실 최대규모의 왕릉군이다
.
구리시 인창동 검암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며
9
개의 능에
17
위
(
位
)
에 달하는 조선의 왕과 왕비 유택이 있는 가족묘다
.
총 면적이
191
만
5,890
제곱미터나 된다
.
동구릉은 사적 제
193
호로 지정되어 있다
.
1408
년 태조의 왕릉이 자리하고 건원릉이라 이름한 뒤
, 1855
년
(
철종
6)
익종
(
翼宗
)
의 능인 수릉이
9
번째로 조성되어 동구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
1.
원릉
(
영조와 영조의 비 정순왕후의 능
)
의 개요
●
위치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
능의 형식
:
쌍릉
●
능의 조성
: 1776
년
(
정조 즉위
), 1805
년
(
순조
5)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답사] 구리 동구릉 영조와 정순왕후의 능, ‘원릉’ 2 img](https://blog.kakaocdn.net/dn/bS8zN6/btrMyhOhiB3/oVF5wx9Z1I56Z3orcsQ7C0/img.jpg)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답사] 구리 동구릉 영조와 정순왕후의 능, ‘원릉’ 3 img](https://blog.kakaocdn.net/dn/LqWmR/btrMyfbOtuJ/BoZw5eukG1k5UcgbeE5StK/img.jpg)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답사] 구리 동구릉 영조와 정순왕후의 능, ‘원릉’ 4 img](https://blog.kakaocdn.net/dn/ZnnXi/btrMp3EcDcJ/f7IDmvjOHuRNgPmOksWgn0/img.jpg)
2.
능의 구성
원릉은 조선
21
대 영조와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 김씨의 능이다
.
쌍릉의 형태이며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
서쪽
)
이 영조
,
오른쪽
(
동쪽
)
이 정순왕후의 능이다
.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
왕과 왕비의 능 앞에 각각 혼유석
1
좌씩 배치되었다
.
망주석 기단부에 조각된 꽃무늬가 세련되고 화려하며 오른쪽 망주석에 새겨진 세호는 위를 향하고 있고
,
왼쪽 망주석에 새겨진 세호는 아래로 내려가는 모양을 하고 있다
.
장명등은 사각옥개형의 장명등으로 화사석
(
火舍石
)
과 옥개석 부분을 제외하고 상
,
중
,
하대석 부분은 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
영조의 원릉을 시작으로 중계와 하계 사이의 단을 없애고 문석인과 무석인을 한 단에 같이 배치하였다
.
능침 아래의 비각에는 총
3
기의 표석이 건립되었다
. 1
비는
1776
년 영조 승하 후에 세운 영종대왕 표석
, 2
비는 영조 추존 후 세운 영조대왕 표석
, 3
비는
1805
년
(
순조
5)
에 세운 정순왕후 표석이다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답사] 구리 동구릉 영조와 정순왕후의 능, ‘원릉’ 5 img](https://blog.kakaocdn.net/dn/lE9Aq/btrMt4ipsxf/231edhIi7NVTmjXjMTsxm0/img.png)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답사] 구리 동구릉 영조와 정순왕후의 능, ‘원릉’ 6 img](https://blog.kakaocdn.net/dn/b2csoZ/btrMxWp5rkx/SzGyYqdApJodAAghwbued1/img.png)
3.
능의 역사
이곳은 원래 효종의 구 영릉
(
寧陵
)
자리였다
.
영릉을 조성한 이후 석물에 틈이 생기는 등 여러 문제점이 발견되어 지속적으로 수리하였는데
,
이 과정에서 그간 봉심
(
왕명을 받들어 능침을 보살피는 일
)
을 소홀히 한 관리들을 벌하기도 하였다
.
1673
년
(
현종
14)
천릉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확인한 결과 재궁과 외재궁에는 흠이 없었다
.
이후
1776
년
(
영조
52)
에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
건원릉 서쪽 두 번째 산줄기인 구 영릉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
영조는
1757
년
(
영조
33)
에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의 홍릉을 조성하면서 자신의 능 자리를 미리 만들어 쌍릉으로 조성하기를 원하였지만
,
손자인 정조가 현재의 자리에 영조의 능을 조성하고 원릉이라 하였다
.
그 후 정순왕후 김씨가
1805
년
(
순조
5)
에 세상을 떠나자
,
원릉에 쌍릉으로 능을 조성하였다
.
4.
영조 이야기
영조
(
재세
: 1694
년
~ 1776
년
,
재위
: 1724
년
~ 1776
년
)
는 숙종과 숙빈 최씨의 아들로
1694
년
(
숙종
20)
에 창덕궁 보경당에서 태어났다
. 1699
년
(
숙종
25)
에 연잉군에 봉해지고
,
경종이 즉위한 후에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
당시 왕세제 책봉을 주장하는 노론과 시기상조론을 들어 반대한 소론 간의 정쟁이 극심했으며
,
영조 자신도 이 소용돌이에 휘말려 경종을 시해하려는 시도에 가담했다는 모함을 받기도 하였다
.
이런 치열한 경쟁과 우여곡절 끝에
1724
년에 경종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
영조는 붕당의 대립 자체를 완화 및 해소하는 것을 왕정의 큰 과제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리하여 즉위와 동시에 왕권을 강화하고
,
균형 있는 인재 등용을 통하여 탕평세력을 구축하였다
.
영조는 탕평 정치로 조정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여러 가지 폐단을 고치는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
특히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어온 군역을 감소한 균역법을 시행하고
,
노비 신공을 혁파하는 등 획기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
또 청계천 건설과 여러 사치풍조를 금지하고 법제도를 개편하여
,
『
속오례의
』
,
『
국조상례보편
』
등을 저술하였다
.
그러나 붕당정치의 폐단으로 즉위 초에 경종 독살설에 휘말려 옥사가 일어났고
, 1762
년
(
영조
38)
에는 세자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벌열의 움직임에 대한 과도한 경계심으로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이는 참사를 빚기도 하는 등
,
붕당정치의 혼란을 완전히 잠재우지는 못하였다
.
조선 역대 임금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긴
53
년의 기간을 재위한 영조는
1776
년에 경희궁 집경당에서
83
세로 세상을 떠났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