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12월 1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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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답사] 구리 동구릉 영조와 정순왕후의 능, ‘원릉’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답사


]


구리 동구릉 영조와 정순왕후의 능


, ‘


원릉






안녕하세요


.


좋은 하루 되세요


^^


며칠 전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구리 동구릉을 답사하였는데


,


오늘은 그중에서 영조와 영조의 두 번째 왕비인 정순왕후의 능인 원릉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


img


구리 동구릉은 동쪽에 있는


9


기의 능이라는 뜻으로


,


조선 왕실 최대규모의 왕릉군이다


.


구리시 인창동 검암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며


9


개의 능에


17





(





)


에 달하는 조선의 왕과 왕비 유택이 있는 가족묘다


.


총 면적이


191





5,890


제곱미터나 된다


.


동구릉은 사적 제


193


호로 지정되어 있다


.




1408


년 태조의 왕릉이 자리하고 건원릉이라 이름한 뒤


, 1855





(


철종


6)


익종


(


翼宗


)


의 능인 수릉이


9


번째로 조성되어 동구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


1.


원릉


(


영조와 영조의 비 정순왕후의 능


)


의 개요





위치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능의 형식


:


쌍릉





능의 조성


: 1776





(


정조 즉위


), 1805





(


순조


5)


img


img


img


2.


능의 구성


원릉은 조선


21


대 영조와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 김씨의 능이다


.


쌍릉의 형태이며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


서쪽


)


이 영조


,


오른쪽


(


동쪽


)


이 정순왕후의 능이다


.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


왕과 왕비의 능 앞에 각각 혼유석


1


좌씩 배치되었다


.


망주석 기단부에 조각된 꽃무늬가 세련되고 화려하며 오른쪽 망주석에 새겨진 세호는 위를 향하고 있고


,


왼쪽 망주석에 새겨진 세호는 아래로 내려가는 모양을 하고 있다


.


장명등은 사각옥개형의 장명등으로 화사석


(


火舍石


)


과 옥개석 부분을 제외하고 상


,





,


하대석 부분은 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


영조의 원릉을 시작으로 중계와 하계 사이의 단을 없애고 문석인과 무석인을 한 단에 같이 배치하였다


.


능침 아래의 비각에는 총


3


기의 표석이 건립되었다


. 1


비는


1776


년 영조 승하 후에 세운 영종대왕 표석


, 2


비는 영조 추존 후 세운 영조대왕 표석


, 3


비는


1805





(


순조


5)


에 세운 정순왕후 표석이다


.


img


img


3.


능의 역사


이곳은 원래 효종의 구 영릉


(


寧陵


)


자리였다


.


영릉을 조성한 이후 석물에 틈이 생기는 등 여러 문제점이 발견되어 지속적으로 수리하였는데


,


이 과정에서 그간 봉심


(


왕명을 받들어 능침을 보살피는 일


)


을 소홀히 한 관리들을 벌하기도 하였다


.




1673





(


현종


14)


천릉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확인한 결과 재궁과 외재궁에는 흠이 없었다


.


이후


1776





(


영조


52)


에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


건원릉 서쪽 두 번째 산줄기인 구 영릉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


영조는


1757





(


영조


33)


에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의 홍릉을 조성하면서 자신의 능 자리를 미리 만들어 쌍릉으로 조성하기를 원하였지만


,


손자인 정조가 현재의 자리에 영조의 능을 조성하고 원릉이라 하였다


.


그 후 정순왕후 김씨가


1805





(


순조


5)


에 세상을 떠나자


,


원릉에 쌍릉으로 능을 조성하였다


.


4.


영조 이야기


영조


(


재세


: 1694





~ 1776





,


재위


: 1724





~ 1776





)


는 숙종과 숙빈 최씨의 아들로


1694





(


숙종


20)


에 창덕궁 보경당에서 태어났다


. 1699





(


숙종


25)


에 연잉군에 봉해지고


,


경종이 즉위한 후에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


당시 왕세제 책봉을 주장하는 노론과 시기상조론을 들어 반대한 소론 간의 정쟁이 극심했으며


,


영조 자신도 이 소용돌이에 휘말려 경종을 시해하려는 시도에 가담했다는 모함을 받기도 하였다


.


이런 치열한 경쟁과 우여곡절 끝에


1724


년에 경종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


영조는 붕당의 대립 자체를 완화 및 해소하는 것을 왕정의 큰 과제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리하여 즉위와 동시에 왕권을 강화하고


,


균형 있는 인재 등용을 통하여 탕평세력을 구축하였다


.


영조는 탕평 정치로 조정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여러 가지 폐단을 고치는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


특히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어온 군역을 감소한 균역법을 시행하고


,


노비 신공을 혁파하는 등 획기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


또 청계천 건설과 여러 사치풍조를 금지하고 법제도를 개편하여


,





속오례의





,





국조상례보편





등을 저술하였다


.


그러나 붕당정치의 폐단으로 즉위 초에 경종 독살설에 휘말려 옥사가 일어났고


, 1762





(


영조


38)


에는 세자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벌열의 움직임에 대한 과도한 경계심으로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이는 참사를 빚기도 하는 등


,


붕당정치의 혼란을 완전히 잠재우지는 못하였다


.


조선 역대 임금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긴


53


년의 기간을 재위한 영조는


1776


년에 경희궁 집경당에서


83


세로 세상을 떠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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