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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11월 4,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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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답사] 구리 동구릉 24대 조선 헌종과 효현황후·효정황후의 능, ‘경릉’


[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답사


]


구리 동구릉


24


대 조선 헌종과 효현황후


·


효정황후의 능


, ‘


경릉





안녕하세요


.


좋은 하루 되세요


^^


며칠 전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구리 동구릉을 답사하였는데


,


오늘은 그중에서


24


대 조선 헌종과 효현황후


·


효정황후의 비인 장렬왕후의 능인 경릉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


구리 동구릉은 동쪽에 있는


9


기의 능이라는 뜻으로


,


조선 왕실 최대규모의 왕릉군이다


.


구리시 인창동 검암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며


9


개의 능에


17





(





)


에 달하는 조선의 왕과 왕비 유택이 있는 가족묘다


.


총 면적이


191





5,890


제곱미터나 된다


.


동구릉은 사적 제


193


호로 지정되어 있다


.




1408


년 태조의 왕릉이 자리하고 건원릉이라 이름한 뒤


, 1855





(


철종


6)


익종


(


翼宗


)


의 능인 수릉이


9


번째로 조성되어 동구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





1.


경릉


景陵


(24


대 조선 헌종과 효현황후


·


효정황후의 능


)


의 개요


● 위치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 능의 형식


:


삼연릉


● 능의 조성


: 1843





(


헌종


9), 1849





(


철종 즉위


), 1904





(


광무


7)

















2.


능의 구성





경릉은 조선


24


대 헌종성황제와 첫 번째 왕비 효현성황후 김씨와 두 번째 왕비 효정성황후 홍씨의 능이다


.


경릉은 세 개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삼연릉


(


三連陵


)


의 형태로 조선왕릉 중 유일하다


.


정자각 앞쪽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헌종


,


가운데가 효현성황후


,


오른쪽이 효정성황후의 능이다


.


세 봉분은 모두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을 둘렀으며


,


난간석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


각 봉분 앞에는 혼유석을 따로 설치하였다


.


능침 아래에는 정자각


,


비각


,


홍살문


,


판위 등이 배치되었으며


,


비각에는 한 개의 표석이 있다


.


표석은 대한제국 선포 후 황제 추존으로 바꾼 표석으로


,


전면에는





대한 헌종성황제 경릉 효현성황후 부좌 효정성황후 부좌





라 써있다


.


3.


능의 역사


처음 경릉자리는 선조의 목릉


(


穆陵


)


이 있던 자리였는데


, 1630





(


인조


8)


에 목릉에 물길이 있고 풍수상 불길하다는 심명세의 상소로 목릉천장을 확정하고 구릉을 파고 현궁을 열어 보니 물기가 없어 그의 불길론은 해소되었다


.


이 후 헌종의 첫 번째 왕비 효현성황후 김씨가


1843





(


헌종


9)


에 세상을 떠나


,


현재의 자리에 처음 능을 조성하였다


. 6


년 뒤인


1849


년에 헌종이 세상을 떠나자


, 13


곳의 택지를 간심한 끝에





십전대길지


(


十全大吉地


)’


의 명당이라고 주장한 효현성황후의 경릉 오른쪽에 능을 조성하였다


.


대한제국 선포 후


1904





(


광무


8)


에 헌종의 두 번째 왕비 효정성황후 홍씨가 세상을 떠나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


4.


헌종성황제


(


憲宗成皇帝


)


이야기


헌종


(


재세


: 1827





~ 1849





,


재위


: 1834





~ 1849





)


은 추존 문조와 신정익황후 조씨의 아들로


1827





(


순조


27)


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 1830





(


순조


30)


에 왕세손으로 책봉되고


, 1834


년에 순조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


8


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으므로 할머니인 순원숙황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실시하였다


.


헌종 연간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가 서로 대립하여 두 차례의 역모 사건이 일어났으며


,


삼정


(


전정


,


군정


,


환곡


)


의 문란으로 백성들이 큰 부담을 안고 살아가던 시기였다


.


또 천주교 탄압


(


기해박해


)


으로 인해 외국 군함이 처음으로 조선 근해에 나타나 민심이 흉흉했다


.


친정 후에는





동문휘고





,





열성지장





,





동국사략





,





삼조보감





등을 완성하였으며


,


각 도에 제언을 수축하게 하는 등의 치적을 쌓았다


.


그 후


1849





(


헌종


15)


에 창덕궁 중희당에서


23


세로 세상을 떠났다


. 1908





(


융희


2)


에 헌종성황제로 추존되었다


.


1837





(


헌종


3)


에 효현성황후를 왕비로 맞이하였으나


, 6


년 뒤에 소생 없이 세상을 떠났다


.


그 후 두 번째 왕비를 맞아들이기 위하여 스스로 간택에 참여하였는데


,


이는 왕이 간택에 직접 참여한 유일한 예였다


.


헌종은 김씨 여인을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간택의 최종 결정권은 왕실의 어른인 대왕대비에게 있었고


,


김씨 여인이 아닌 홍재룡의 딸 효정성황후가 최종 간택되어 왕비로 책봉되었다


.


이에 헌종은


3


년을 고심한 끝에 왕비가 후사를 생산할 가능성이 없다는 핑계로 대왕대비의 허락을 받아 삼간택에서 낙선한 김씨를 후궁으로 간택하였다


.


헌종은 경빈 김씨를 위하여


1847





(


헌종


13)


창덕궁 서쪽에 별궁인 낙선재를 지어주기까지 하였다


.


예술을 사랑한 헌종은 경빈 김씨와 함께 이 별궁에서 고금 명가의 유필을 벗 삼아 지내기를 좋아하였다


.


낙선재에 여러 차례 불려 들어갔던 조선 후기 서화가 소치 허유


(


許維


)


의 기록에는 낙선재는 헌종이 평상시 거처하는 곳이며


,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쓰여진 현판이 가득하다는 등의 묘사가 잘 드러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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