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답사
]
구리 동구릉
24
대 조선 헌종과 효현황후
·
효정황후의 능
, ‘
경릉
’
안녕하세요
.
좋은 하루 되세요
^^
며칠 전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구리 동구릉을 답사하였는데
,
오늘은 그중에서
24
대 조선 헌종과 효현황후
·
효정황후의 비인 장렬왕후의 능인 경릉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
구리 동구릉은 동쪽에 있는
9
기의 능이라는 뜻으로
,
조선 왕실 최대규모의 왕릉군이다
.
구리시 인창동 검암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며
9
개의 능에
17
위
(
位
)
에 달하는 조선의 왕과 왕비 유택이 있는 가족묘다
.
총 면적이
191
만
5,890
제곱미터나 된다
.
동구릉은 사적 제
193
호로 지정되어 있다
.
1408
년 태조의 왕릉이 자리하고 건원릉이라 이름한 뒤
, 1855
년
(
철종
6)
익종
(
翼宗
)
의 능인 수릉이
9
번째로 조성되어 동구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
1.
경릉
景陵
(24
대 조선 헌종과 효현황후
·
효정황후의 능
)
의 개요
● 위치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 능의 형식
:
삼연릉
● 능의 조성
: 1843
년
(
헌종
9), 1849
년
(
철종 즉위
), 1904
년
(
광무
7)
2.
능의 구성
경릉은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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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헌종성황제와 첫 번째 왕비 효현성황후 김씨와 두 번째 왕비 효정성황후 홍씨의 능이다
.
경릉은 세 개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삼연릉
(
三連陵
)
의 형태로 조선왕릉 중 유일하다
.
정자각 앞쪽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헌종
,
가운데가 효현성황후
,
오른쪽이 효정성황후의 능이다
.
세 봉분은 모두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을 둘렀으며
,
난간석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
각 봉분 앞에는 혼유석을 따로 설치하였다
.
능침 아래에는 정자각
,
비각
,
홍살문
,
판위 등이 배치되었으며
,
비각에는 한 개의 표석이 있다
.
표석은 대한제국 선포 후 황제 추존으로 바꾼 표석으로
,
전면에는
‘
대한 헌종성황제 경릉 효현성황후 부좌 효정성황후 부좌
’
라 써있다
.
3.
능의 역사
처음 경릉자리는 선조의 목릉
(
穆陵
)
이 있던 자리였는데
, 1630
년
(
인조
8)
에 목릉에 물길이 있고 풍수상 불길하다는 심명세의 상소로 목릉천장을 확정하고 구릉을 파고 현궁을 열어 보니 물기가 없어 그의 불길론은 해소되었다
.
이 후 헌종의 첫 번째 왕비 효현성황후 김씨가
1843
년
(
헌종
9)
에 세상을 떠나
,
현재의 자리에 처음 능을 조성하였다
. 6
년 뒤인
1849
년에 헌종이 세상을 떠나자
, 13
곳의 택지를 간심한 끝에
‘
십전대길지
(
十全大吉地
)’
의 명당이라고 주장한 효현성황후의 경릉 오른쪽에 능을 조성하였다
.
대한제국 선포 후
1904
년
(
광무
8)
에 헌종의 두 번째 왕비 효정성황후 홍씨가 세상을 떠나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
4.
헌종성황제
(
憲宗成皇帝
)
이야기
헌종
(
재세
: 1827
년
~ 1849
년
,
재위
: 1834
년
~ 1849
년
)
은 추존 문조와 신정익황후 조씨의 아들로
1827
년
(
순조
27)
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 1830
년
(
순조
30)
에 왕세손으로 책봉되고
, 1834
년에 순조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
8
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으므로 할머니인 순원숙황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실시하였다
.
헌종 연간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가 서로 대립하여 두 차례의 역모 사건이 일어났으며
,
삼정
(
전정
,
군정
,
환곡
)
의 문란으로 백성들이 큰 부담을 안고 살아가던 시기였다
.
또 천주교 탄압
(
기해박해
)
으로 인해 외국 군함이 처음으로 조선 근해에 나타나 민심이 흉흉했다
.
친정 후에는
『
동문휘고
』
,
『
열성지장
』
,
『
동국사략
』
,
『
삼조보감
』
등을 완성하였으며
,
각 도에 제언을 수축하게 하는 등의 치적을 쌓았다
.
그 후
1849
년
(
헌종
15)
에 창덕궁 중희당에서
23
세로 세상을 떠났다
. 1908
년
(
융희
2)
에 헌종성황제로 추존되었다
.
1837
년
(
헌종
3)
에 효현성황후를 왕비로 맞이하였으나
, 6
년 뒤에 소생 없이 세상을 떠났다
.
그 후 두 번째 왕비를 맞아들이기 위하여 스스로 간택에 참여하였는데
,
이는 왕이 간택에 직접 참여한 유일한 예였다
.
헌종은 김씨 여인을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간택의 최종 결정권은 왕실의 어른인 대왕대비에게 있었고
,
김씨 여인이 아닌 홍재룡의 딸 효정성황후가 최종 간택되어 왕비로 책봉되었다
.
이에 헌종은
3
년을 고심한 끝에 왕비가 후사를 생산할 가능성이 없다는 핑계로 대왕대비의 허락을 받아 삼간택에서 낙선한 김씨를 후궁으로 간택하였다
.
헌종은 경빈 김씨를 위하여
1847
년
(
헌종
13)
창덕궁 서쪽에 별궁인 낙선재를 지어주기까지 하였다
.
예술을 사랑한 헌종은 경빈 김씨와 함께 이 별궁에서 고금 명가의 유필을 벗 삼아 지내기를 좋아하였다
.
낙선재에 여러 차례 불려 들어갔던 조선 후기 서화가 소치 허유
(
許維
)
의 기록에는 낙선재는 헌종이 평상시 거처하는 곳이며
,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쓰여진 현판이 가득하다는 등의 묘사가 잘 드러나 있다
.